이 시기 돌궐의 가한은 묵철이 아니라, 여전히 골돌록이었다.<?-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돌궐문비명의 기재에 근거하면, 골돌록은 후돌궐 정권을 공고히 한 후, 서북쪽으로의 확장을 개시..
영순 2년(683), 돌궐이 선우부성을 공위했고, 도호부사마 장행사가 사로잡혀 죽었으며,(154) 선우도호부의 공능은 이에 이르러 상실되었다.(155) 이후, 돌궐인은 다시 창끝을 막북지구의 안북도호부로 돌렸다. 이전에 서술한 대로, 해 부는 당이 철륵, 회흘제부를 기미하여..
동일 비명에 기재된 바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 “돌궐의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说道 설도] : ‘나는 일찍이 국가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내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국가를 얻는가?’ - 그들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가한의 인민이었으나, (..
정관 4년(630) 동돌궐을 정복한 당군도, 바로 이정이 정양도행군대총관에 충임되어 최고통수가 된 행군이 완성했다.(140) 현재 선우도호부는 수십만 돌궐인의 반란에는 대응할 수 없었으며, 당정은 자연스럽게 다시 배행검을 파견해 정양도행군대총관에 충임시키고 나아가 진압..
또 <구당서> 권194 상 돌궐전 상에 기재된 소사업의 “병사들 중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는 것과, 그 수하의 장령 화대지, 이경가가 “보병을 이끌고 또 가서 싸워, 선우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136)라고 한 것은, 나머지 병마가 많았을 리 없다[不会 불회]는 것을 ..
이에 근거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연연도호부는 정관 21년(647) 설립되어, 철륵제부를 관할했고; 영휘 원년 당이 거비를 평정한 후에는 단지 한해도호부를 증설하여, 오로지 거비부를 안설시키기 위한 낭산도독부와 정관 4년 설치된 정양, 운중 2부를 관리했고, 이 중에 속한 부중은..
그러나, 도호부의 설치는, 필경 당정이 직접 파병하여 주류시키고 수비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직관계통은 중앙에 직예되었다. 연연부의 도호 이소립은 당조의 관원이었고, 그 전에는 양주사마였다.(117) 이로 인해 당이 연연부를 설치한 것은 막북의 땅에 대하여 더 유효한 ..
나는 이 설명에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 중에 따라 우리가 정관 4년 돌궐 항복 후를 보면[看到 간도], 기본적으로 반항활동이 출현한 적이 없고, 때문에 당정이 기미부주 체제를 취하여 안무하고 공제했다. 정관 13년(639) 결사솔이 당 태종을 모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
제5절 북수{북변}[北陲 북수] 양 대도호부의 확립<?-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위의 한 절에서, 우리는, 기미부주의 유한성이 바로 그 스스로에게서 내원한다는 설명을 시도했다. 이런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