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유럽 정세 18세기를 거쳐 유럽이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그 사이 네덜란드의 국력은 서서히 시들어갔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가 미국을 지지한 것을 계기로 제4차 영란전쟁(1780-1784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 참패함에 따라, 네덜란드의 해운, 무역업, ..
레자노프 내항 예고 정보 러시아 사절 레자노프의 내항은, 그보다 2개월 정도 전에 네덜란드 상관장이 나가사키 부교에게 알렸다. 상관장 두프의 일기, 1804년 8월 8일 조를 보자. 배가 도착한 후 나는 즉시 고나이요카타(御内用方) 대통사인 나카야마 사쿠사부로(中山作三郎)와..
동인도 회사의 소멸 1796년에서 1807년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네덜란드(1799년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그 이후는 바타비아 공화국 치하의 식민지 정부)는 일본에 배를 거의 못 보냈다. 그래서, 항해 경로 상에 영국 배에 나포될 가능성이 낮은 중립국(미국이나 덴마크,..
일본 상관에서 철수를 검토한 VOC 1801년, 런던에 있던 티칭이 친구인 탄바 후쿠치야마(丹波福知山) 번주, 쿠츠키 마사츠나(朽木昌綱)에게 보낸 개인 서신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쿠츠키 마사츠나는 일본 굴지의 네덜란드어 능력자였다. 이 편지도 네덜란드어로 ..
무역 교섭의 협상패로 쓰인 풍설서 1780년에 제4차 영란전쟁이 발발했다. 그로 인해, 네덜란드 선박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 또는 아시아 역내에서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 무역에 돌아갈 배가 부족하게 된다. 더욱이, 1787년부터 시작한 칸세이 개혁(寛政改革)의..
사라져가는 가톨릭 세력의 공포 1690년에서 1715년까지는 대개 예년과 같이 시암에서 오는 소식 만을 전하는 풍설서가 작성되었다. 그 중 몇 편은 아예 "시암 풍설"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시암 정보에 특화된 풍설서가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
시암 정세와 연결해서 전달하라 1689년 7월 1일자 서한에서 캄파위스 총독은 일본 상관장 코르넬리스 판 아우트호른(Cornelis van Outhoorn)에게, 자신의 판단을 덧붙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전 상관장 헨드릭 판 바위텐험 각하가, 에도 막부의 고관으로부터 유럽의 ..
막부는 유럽에 관심 없다. 1688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통상조약의 체결을 위해 시암의 새 왕 페트라짜에게 서한을 보냈다.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 요하네스 캄파위스(Johannes Camphuys는 영국의 대(對) 시암 공작이 회사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영국에서 시암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시암 왕국 한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나라이 왕과 조약을 체결하여, 시암산(産) 소목, 사슴가죽 따위를 독점적으로 일본에 수출할 권리를 얻었다. 그 대신 회사는, 시암 정크선이 일본산 구리를 시암으로 가지고 들어올 독점적 권리를 인정했다. ..